오늘처럼 고요히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합니다. 이제 스물두 살. 딸과 나의 나이 차이는 스무 살.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한 남자의 나이는 서른두 살. 나와 그 남자의 나이 차는 열 살입니다. 나는 사고로 죽은 남편을 이어 화물 운송업을 합니다. 여자가 하기에는 일이 힘들고 거칠다고 생전의 남편도 말렸던 일입니다. 그날 남편은 일 나가기가 싫다고 했습니다. 나는 억지로 깨어서 남편을 보냈습니다. 빗길 사고였습니다. 택배 일이라도 해보겠다고 운전을 배우고 합격 인지를 붙인 순간 경찰서에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종종 생각합니다. 그날 나가기 싫다는 남편을 그냥 두었더라면 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게 삶이라 만약으로 시작되는 가정으로만 힘든 세월을 보냅니다. 남편이 그렇게 황망하게 죽고 물건을 싣고 전국을 돌아다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은 제 외할머니 손에 컸습니다. 친정 엄마는 아비 없는 애라고 지극 정성으로 키웠습니다. 그게 또 못마땅해 저는 아이를 제 품으로 옭아매고 싶었습니다. 길 위의 삶이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지 짐작이 가시나요? 기름값 벌어 기름값 대기 바쁩니다. 여자라고 무시당하기도 하고 가벼운 농담쯤은 이제는 알아서 걸러 듣습니다. 남편이 죽고 남긴 건 임대 아파트 한 채와 낡은 트럭이 전부입니다. 반복적으로 파업이 일어나도 저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학교에 보낼 아이가 있고 세상천지 우리 두 식구 돌봐줄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넉넉히 키우진 못했지만 딸아이는 잘 자라주었습니다. 대학도 가고 취업도 했습니다. 벌어먹고 살기 바빴지만 아이는 속 썩이지 않고 착하게 자랐습니다. 아비의 정이 그리웠던 걸까요? 저보다 열 살 많은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를 어쩌지 못했습니다. 인사 온다기에 그러라고 했습니다. 낡은 살림으로 가득한 집을 치우고 사위 사랑은 장모라기에 닭도 한 마리 사서 고아 두었습니다. 내가 좋아한다기에 치자꽃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딸이 미리 말을 해두었겠지요. 누추한 집이라고 먼저 말을 건넸습니다. 남자는 집 구경을 하겠다고 이 방 저 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집 보러 온 것도 아닐 텐데 처음 집에 온 사람치고 거침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집 안 사정을 모두 말했습니다. 내심 그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해주면 좋을 텐데 남자는 빨리 가봐야 한다는 눈치만 보였습니다. 곱창집 남자와는 만난 지 꽤 되었지만 그이가 하는 말을 다 온전히 귀담아들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암으로 아내를 잃고 아들은 장가보내고 혼자 식당을 하는 나보다 열여덟 많은 그이. 같이 살림을 합치자는 말이 자꾸 생각납니다. 지금 사는 집을 팔고 트럭을 처분하면 딸아이 혼수 비용은 나올 것이라는 계산이 섰습니다. 깨끗하게 씻고 그이의 가게 앞에 섰습니다. 그때 그이와 아들이 주고받는 대화가 들렸습니다. "여자가 화물차 몰았다면 뻔할 거 아니에요. 큰 차 모는 인간들처럼 거칠고 더럽고 몰상식하고! 게다가 아무 데서나 처자빠져 자는 여자를 어떻게 집에 들여요!" 아들의 말이 상처로 남습니다. 혼자된 여자가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데 저들은 쉽게도 말하네요. 상견례 갔다 온 딸의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다그쳐 물었습니다. 나의 직업을 듣고 바로 싫은 표정을 하더랍니다. 어떤 집일지 뻔히 안다고. 남자도 결혼을 잠시 미루자고 했답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인상이 좋지 않았는데 그 값을 합니다. 남의 집 방문을 열고 검사하듯 쳐다보고 밥도 먹지 않고 급하게 가버리고. 딸아이는 울음을 그치지 않습니다. 설마 하는데 뱃속에 애가 있답니다. 나처럼은 살게 할 순 없습니다. 애가 들었다고 일찍 결혼을 해서 갖은 고생을 하며 살았습니다. 딸 팔자는 제 엄마를 닮는다더니. 미치고 환장할 노릇입니다. 어르고 달래고 화내서 병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 후 딸애의 행동은 이상해졌습니다. 혼자 웃고 울고 술을 마시고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탐했습니다. 지금은 너무 더우니 한 계절만 기다려 달라고 딸이 말합니다. 화낼 기운도 없습니다. 젊으니 젊다는 게 이유가 돼서 살아갈 것이라고 위안을 합니다. 속이 좋지 않고 얼굴이 가맣게 변해가는 것이 이상해 병원에 가보았습니다. 애가 들어섰다고 의사가 말합디다. 당장 내일 날짜로 수술 날짜를 잡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허기가 져서 순대를 급히 사 먹었습니다. 뱃속에 든 그것이 살아 있다는 살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는 것 같습니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들립니다. 딸이 씻고 있나 봅니다. 여름 내내 씻지도 않고 이불만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아이에게서는 썩은 내가 났습니다. 살려고 하나 봅니다. 살아야지요. 어떻게 얻은 목숨인데. 물소리만 나고 아이는 빨리 나오지 않습니다. 이상해서 들어가 보니 아이는 손목을 긋고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었습니다.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테다. 그 말을 하자 온 마음이 고요해졌습니다. 서둘러 구급차를 부르고 아이를 병원으로 날랐습니다. 폭염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뜨거움입니다.
나도 따라 죽을 거야.
그렇게 되뇌니, 세상처럼 마음도 고요해졌다.
햇빛 덜 받는 사람들을 응시하는 정직한 눈길과
그 주위의 그늘을 집요하게 파헤치는 엄정한 태도,
이 삶이 나빠지길 멈추지 않는 한 김이설의 소설쓰기는 계속될 것이다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열세 살」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올해로 등단 10년을 맞는 소설가 김이설의 두번째 소설집 오늘처럼 고요히 가 출간되었다. 2010년에 펴낸 첫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이후 꼬박 6년 만이다. 소설집으로는 더딘 발걸음이지만, 그사이 작가는 경장편소설 나쁜 피 환영 선화 (그리고 현재, 격월간 소설 잡지 Axt 에 장편 어쩌면 아주 다른 사람 을 연재하고 있다) 등을 잇따라 출간하며, ‘김이설’이라는 단어에 단단한 무늬를 새겨넣었다. 그 무늬란 폭력이 우글거리는 밑바닥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 그 세계의 진상을 선명히 감각하게 하는, 그리하여 그 세계에서 한 발 떨어진 채 지켜온 우리의 평온함이라는 게 얼마나 기만적인지를 되물음으로써 각인된 것이었다.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집념 혹은 치열함을 느끼게 한다 (소설가 은희경)라는 평을 받으며 제3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한 「부고」와 2016년 이상문학상 우수상으로 선정된 「빈집」을 포함해 총 9편의 소설이 수록된 이번 소설집을 통해, 김이설은 그 벗어날 길 없는 세계에서 삶은 어떻게 이어질 수 있는가, 아니 그런 삶도 과연 지켜나갈 만한 것인가, 라는 둔중하고도 무서운 질문을 던진다. 그리하여 ‘오늘처럼 고요히’라는 제목은 수록된 소설들의 전체 이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오지 않으리라는 걸 체득한 인물들이 내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바람이 된다.
미끼 _007
부고 _047
폭염 _075
흉몽 _111
한파 특보 _137
비밀들 _173
복기 _235
아름다운 것들 _269
빈집 _297
해설│김신식(감정사회학도, 독립연구자)
착잡한 자들의 몸짓 _327
작가의 말 _343